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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의 폭정과 백모 월산대군부인 박씨와의 관계, 중종반정

 

연산군은 조선시대에 폭정을 일삼고 신하와 백성들을 탄압한 조선역사상 가장 악명높은 최고의 폭군이지요.

 

연산군의 심한 폭정 때문에,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죽고, 백성들의 삶이 도탄이 빠지자, 박원종을 비롯한 대신들은 정변을 일으켜서,

연산군을 폐위하고 중종을 새로운 임금으로 떠받들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중종반정이랍니다.

 

우리 조선시대에 최초로 신하들이 왕을 폐위시킨 사건이 중종반정인데, 연산군의 폭정이 얼마나 심하고, 얼마나 신하와 백성들을 심하게 괴롭혔으면, 충성을 다해야할 대신들이 난을 일으켜서,

연산군을 왕의 자리에서 끌어내렸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그의 폭정이 얼마나 대단했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답니다.

 

연산군은 우리 역사상 가장 심한 폭정을 일삼고 패악질을 저지른 패륜군주로 악명이 높은데, 그가 저지른 패악질은 로마의 폭군 네로황제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고 봅니다.

 

일각에서는 연산군이 어머니 폐비 윤씨의 억울한 죽음 때문에, 심성이 뒤틀리고 비뚤어지게 되어서 폭정과 패륜을 저지르는 폭군이 되었다고 하지만,

연산군의 폭정과 패륜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것으로, 그의 본래의 성정이 사악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정답이랍니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의 패악을 저지른 최고의 패륜군주라는 불명예를 갖고있는 연산군이랍니다.

 

 

연산군이 재위기간에 저지른 패악들은 엄청나게 많은데, 사치와 방탕한 생활, 정무태만, 향략과 음탕한 생활, 그리고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일으켜 수많은 무고한 대신들을 참살해버렸습니다.

 

무오사화 때에 연산군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신하는 6명이었지만, 갑자사회 때에 연산군에 의해서 239명의 대신들이 처벌받았고, 그 중 122명의 대신들이 죽임을 당했답니다.

이렇게 연산군에게 참혹한 죽임을 당한 사람들은 모두 무고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랍니다.

 

또한 연산군은 아버지 성종의 후궁인 귀인 정씨와 귀인 엄씨를 폐비 윤씨를 모함했다는 죄명으로 몽둥이로 두들겨패서 죽여버리는 만행까지 저질렀답니다.

 

아버지의 후궁이자, 사실상 자신의 어머니뻘인 두명의 귀인을 자신의 어머니

페비 윤씨를 모함했다는 누명을 씌워서,

몽둥이를 때려서 죽인 만행은 우리 역사상 연산군이 최초로 행한 가장 잔인한 패

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연산군을 언급할 때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그의 도넘는 지나친 향락생활과 음탕행위라고 합니다.

 

연산군은 포악했을 뿐만 아니라, 엄청나게 여색과 쾌락을 즐겼고, 음탕한 생활을 즐긴 것으로 유명합니다.

 

연산군이 얼마나 방탕했고, 얼마나 쾌락생활을 즐겼는지를 알려주는 증거가 바로 채홍사흥청입니다.

 

 

연산군은 전국 8도에서 얼굴이 예쁜 미인들을 강제로 뽑아들였는데, ‘채홍사라는 관리를 두고 전국각지로 파견을 보내서 얼굴 예쁘고 노래잘하고, 춤 잘추는 처자를 뽑아서 궁궐로 입궁시켜, 연산군의 성적노리개로 삼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뽑힌 미인들은 흥청이라고 불리웠으며, 그녀들은 궁궐에 상주시키면서, 연산군의 방탕한 향락생활에 동원되었고, 이러한 흥청의 수가 무려 2.000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연산군은 이렇게 뽑은 수많은 흥청미녀들과 날마다 주색잡기에 빠졌고, 방탕한 향락생활을 즐겼다고 하는데, 그는 진시황 못지않은 엄청난 성적쾌락을 즐겼던 쾌락군주라고 할 수 있지요.

 

오늘날 무절제하게 낭비한다는 의미로 쓰이는 흥청망정이라는 단어가 바로 이 흥청에서 비롯된 말이라고 하는데, 연산군이 흥청 때문에, 얼마나 사치와 낭비가 심했는지를 단적으로 표현해주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답니다.

 

연산군에게 향락을 제공해주는 이 많은 흥청들에게는 엄청난 특혜가 제공되었는데, 흥청 모두에게 집이 제공되었을 뿐 아니라, 그들 가족들에게는 납세도 면제되고, 노역도 면제되었다고 합니다.

 

수천명이나 되는 흥청미녀들에게 줄 집이 부족해지가, 연산군은 성균관을 흥청미녀들의 숙소로 사용하기까지 합니다.

원래 과거에 급제한 사람들이 공부를 하던 장소인 성균관에서 학생들을 몰아내고 흥청미녀들의 숙소로 사용하도록 했던 겁니다.

 

또한 수천명이나 되는 흥청미녀들에게 지급할 밥그릇과 각종 생활집기를 조달하기 위해서, 양반이나 농민들에게 강제로 필요한 집기들을 뜯어냈다고 하며, 이에 응하지않을 경우 곤장을 때리고 감옥에 가두는 등 엄청난 보복을 가했다고 합니다.

   

 

연산군의 엄청난 사치와 향락생활에 상당히 많은 비용이 들어갔는데, 백성들의 등꼴을 뽑아서 이같은 연산군의 사치향락의 비용을 충당했음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 연산군의 사치항략생활의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서, 백성들은 억울하게 많은 재물을 빼앗기고 엄청난 수탈과 착취를 당할 수밖에 없었고, 백성의 삶은 도탄에 빠지게 되었답니다.

 

조선왕실에 충성을 다해왔던 내관 김처선이 오죽하면 연산군에게 연산군의 사치향략의 부당함을 충고했다가 죽임을 당했을까요?

 

예종과 성종, 연산군 이렇게 3대에 걸쳐서 궁궐내관으로 종사해왔던 충성스러운 내관 김처선이 연산군이 너무 도를 넘는 주색잡기와 난잡한 향략생활을 하는 것을 보고,

선왕 중에서 연산군만큼 풍기문란을 일으키고, 폭정을 일삼는 임금은 없었다고 간언을 올리자, 연산군이 직접 김처선의 양팔을 칼로 베어서 살해했다고 합니다.

 

연산군의 향락추구는 끝을 모를 정도로 오랫동안 지속되었답니다. 심지어 연산군은 자신의 큰어머니를 겁탈하는 패륜까지 저질렀답니다.

 

여기에서는 패륜군주인 연산군이 큰어머니인 박씨부인과에 벌어졌던 불륜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연산군과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의 관계

 

연산군은 자신의 백모인 월산대군의 처 박씨를 범했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월산대군은 연산군의 아버지인 성종의 형이며, 덕종의 아들입니다. 예종이 죽고난 후, 그 다음 보위가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에게 돌아가는 것이 정상이었답니다.

 

 

그런데 월산대군에게 왕위가 돌아가지 않고, 동생인 성종에게 왕위가 돌아간 것은 성종의 장인인 한명회의 정치적 입김이 컸기 때문이랍니다.

 

아뭏튼 월산대군에게는 부인 박씨가 있었는데, 월산대군이 죽고난 후, 부인 박씨는 절에 들어가서 불도를 닦았다고 합니다.

 

이당시 연산군은 자신이 평소에 흠모해왔던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를 절로 찾아가서 만났을 뿐 아니라, 그녀와 간통을 했다고 합니다.

 

당시 연산군과 월산대군 부인 박씨와는 20년의 나이차이가 났는데도, 연산군은 자신의 욕정과 쾌락을 즐기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않았던 대단한 난봉군이었답니다.

 

그런데 연산군과 박씨 사이에는 약간의 특별한 사연이 있습니다.

 

연산군은 아주 어린 나이에 어머니 폐비 윤씨를 잃고, 어머니의 정을 받지못해 몹시 외로워했었지요.

그 당시 연산군의 큰어머니였던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가 궁궐에 자주 들러서, 어머니를 잃고 외톨이가 된 연산군을 가엾게 생각하고는 자주 보듬어주었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정과 사랑에 굶주려있던 연산군은 백모인 월산대군 박씨에게서 모정을 느끼기에 충분했고, 그래서 어렸을 때에 박씨를 많이 따랐다고 합니다.

 

 

그리고 1485년 월산대군이 젊은 나이에 병으로 사망한 후에, 심한 좌절감에 사로잡혔던 박씨는 남편무덤 옆에, ‘흥복사라는 절을 짓고, 종종 이 절에 들러서 불공에 몰두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연산군이 성인이 되고 왕이된 후에, 예전에 자신을 보듬어주었던 백모 박씨를 잊지못하고, 그녀가 수행하고 있는 절 흥복사로 찾아갔던 겁니다.

 

그런데 성인이 된 연산군은 어렸을 때에 박씨에게서 느꼈던 모정이 이제는 겉잡을 수없는 욕정으로 변해버렸고, 그는 박씨의 암자를 찾아들어가 박씨를 거의 반강제적으로 겁탈하는 패륜을 저질렀다고 합니다.

 

이 당시 연산군과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의 나이는 무려 20살의 차이가 났었는데, 연산군은 20살의 나이차이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욕정추구에만 몰두했던 겁니다.

 

그리고 그 후, 연산군은 수시로 백모 박씨가 거주하는 절에 찾아가서, 박씨와의 간통을 계속 이어나갔다고 합니다.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는 연산군이 싫어도 그를 거부할 수 없는 처지였다고 보여지는데,

당시 연산군은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일으켜서 자신의 마음에 안드는 신하들을 백명 이상 죽이는 등 무시무시한 철권통치를 저질렀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랍니다.

 

그리고 연산군은 자신의 첫째아들이 태어나자, 그 아들을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에게 맡겨서 양육시켰다고 합니다.

 

이렇게 연산군은 갖은 구실을 붙여서 백모 박씨와의 관계를 계속 이어나갔고, 연산군은 백모 박씨를 무척 총애해서 그녀에게 승평부 대부인이라는 작위를 내렸고, 그녀에게 곡식과 면포 등 비싼 하사품을 자주 내리고 고액이 녹봉을 내리기도 했답니다.

 

 

연산군과 백모 박씨의 인연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고, 급기야 연산군은 1503년 박씨부인을 궁궐로 불러들이기까지 했습니다.

 

이때 연산군의 나이 28살 때이고 백모 박씨의 나이가 거의 40대 후반의 나이답니다.

 

그리고 입궁한 월산대군 부인 박씨의 방에 연산군이 수시로 자주 찾아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때때로 연산군은 박씨와 함께 밤을 보내는 일도 잦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백모 박씨가 궁궐로 입궁한 후, 연산군은 수시로 박씨의 방을 찾아와서 관계를 가졌고, 두사람 사이에 온갖 추문이 퍼져나갔다고 합니다.

 

이렇게 연산군과 백모 박씨가 가깝게 지냈을 무렵, 백모 박씨의 동생인 박원종은 큰 벼슬을 얻어서 승승장구해나갔다고 합니다.

박원종은 누나 박씨의 후광으로 40세의 젊은나이에 종1품의 숭정대부의 지위까지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숭정대부는 정승보다 더 높은 벼슬이라고 하네요.

 

박원종의 파격적인 승진은 누나 박씨의 후광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고, 그만큼 연산군이 백모 박씨를 끔찍이 총애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랍니다.

 

연산군일기에도 관련내용이 나오는데, ‘박씨가 왕(연산군)에게 총애를 받아서 잉태를 하자, 그녀는 독약을 먹고 죽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니까, 연산군과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와 불륜은 사서 연산군일기에 실제로 나왔던 팩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다른 실록내용에는 박원종의 누나 박씨가 월산대군의 아내로서, 늘 궁궐에 살면서 연산군이 간통했는데, 연산군이 박씨의 동생 박원종을 특별히 여겨서 숭정대부의 품계를 줬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1503년부터 1506년도까지 박씨는 궁궐에 살아왔는데, 1506년도에 박씨는 52세의 나이에 갑자기 자살하고 말았답니다.

 

그런데, 백모 박씨가 연산군의 총애를 받으면서 궁궐에서 살고있을 무렵, 박씨가 갑자기 자살하는 일이 발생했답니다. 

 

월산대군 부인 박씨가 자살했던 이유는 연산군일기등 여러정황으로 볼 때에, 박씨가 연산군과 간통으로 임신을 하게 되었고,

자신의 임신을 수치스럽게 생각하고는, 약을 먹고 자살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답니다.

 

사서에도 박원종이 분하게 여겨서, 누나 박씨에게 왜 참고삽니까? 약이나 먹고 죽으세요!’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나온답니다.

 

이 언급으로 보아서 연산군이 백모 박씨를 상당히 총애하였고, 연산군이 궁궐의 그녀의 방으로 수시로 찾아와서 간통을 한 것 때문에, 박원종이 누나 박씨에게 심한 화를 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누나 박씨가 동생 박원종에게 자신이 임신한 사실을 예기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동생이 누나에게 자살하라고 말할 정도라고 하면, 그것은 여성의 간통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이렇게 월산대군 박씨가 자살로서 죽은지, 2개월이 지난 1506918일 박원종이 주도한 반정세력들이 군사쿠데타를 일으켰는데, 그것이 바로 중종반정이었고,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을 비롯한 반정세력은 궁궐로 습격해서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진성대군을 새로운 왕 중종으로 옹립하고 새로운 정권을 탄생시킵니다.

 

쿠데타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을 졸지에 왕위를 빼앗기고,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당하고 맙니다. 유배를 당한 후, 연산군은 2달만에 갑자기 역병으로 사망하고 맙니다.

 

박원종이 쿠데타를 일으킨 표면적인 이유는 연산군의 폭정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사롭게는 연산군이 자신의 누나 박씨를 겁탈해서 결국 누나 박씨를 임신시키고,

죽음에 이르게 한 것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모욕과 분노를 느꼈기 때문에 연산군에게 복수한 것이라고 추정됩니다. 

 

연산군은 수많은 신하들을 죽이고 절대권력을 얻었고, 자신의 절대권력을 오직 쾌락을 즐기는 데에 사용했던 아주 패덕한 왕이었습니다.

 

그리고 연산군은 자신의 폭정과 향락을 주체하지 못해서 급기야 범해서는 안될 백모님을 범하는 패륜을 저질렀고, 이 패륜행위 때문에 대신들의 분노와 불신임을 받아서, 쿠테타로 왕위에서 쫒겨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자신의 폭정을 마음대로 행하기 위해서, 100명이 넘는 무고한 대신들을 죽이고, 자신의 향락을 즐기기 위해서 전국에서 2,000명의 미인들을 뽑아서 흥청을 만든 것은 우리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고 정말 수치스러운 일이랍니다.

 

 

연산군은 누가 뭐래도 조선역사상 가장 파렴치한 폭군입니다. 백성들의 세금을 뜯어서 자신의 향락과 주색잡기 하는데 낭비하는 바람에, 조선의 국력은 크게 약화되었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연산군의 향락생활과 패륜행위 때문에, 조선의 국력이 크게 약화되었고, 연산군 이후부터 조선은 점점 더 쇠퇴해져만 가게됩니다.

 

그 후 조선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당하면서, 국력이 크게 쇠락하고 망국의 길로 가는 것도, 따지고보면 연산군이 자신의 향락을 위해서 국가재정을 낭비하고, 국력을 약화시켰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선 중기의 시절, 국력을 크게 강화시켜도 모자를 그 중요한 시기에, 연산군은 자신의 알량한 쾌락을 위해서 국가재정을 엄청나게 낭비하는 바람에, 조선의 국운이 쇠하고 이때부터 조선은 점점 쇠락해가고 말았답니다.

 

자신의 권력을 오직 자신의 향락만을 위해서만 사용했던 최고의 패륜군주 연산군은 결코 태어나지 말았어야할 폭군이었습니다.

 

연산군의 음탕한 향락생활을 안믿는 분들을 위해서, 아래에 연산군의 음탕생활을 기록한 연려실기술의 기록을 마지막으로 소개해드리겠어요!

 

연산군은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朴氏)를 세자를 보호해 주라고 핑계하고 대궐 안으로 끌어들여 강간하고, 그 관과 의복을 특이하게 해주고 은으로 만든 도서를 쓰게 하여 품질이 비빈과 같게 하였다. 또 그로 하여금 사은하게 하니, 박씨는 부끄러워 자살하였다

 

-연려실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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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반헬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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