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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알고싶다' 약촌오거리 살인사건의 전모, 진범과 재심결과 무죄

 

대한민국의 형사 살인사건 중 가장 황당한 살인사건을 하나 꼽으라면, 그것은 전북 익산 약촌오거리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약촌오거리 살인사건과 같은 황당한 살인사건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아야 할 것이지만, 문제는 살인을 저지른 범인 못지않게 사건을 담당한 형사와 검사가 무척 악질이라는 데에 있답니다.

 

약촌오거리 살인사건은 우리나라 형사 살인사건 중에서 경찰과 검사에게 가장 치욕스러움을 안겨주었던 사건으로 역사의 한페이지를 장식할 그런 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약촌오거리 살인사건이 최근 또다시 큰 주목을 받게 된 이유는, 약촌오거리 살인사건의 범인이 대법원판결과 형집행이 거의 완료된 시점에서, 진짜 범인이 따로 나타났기 때문이랍니다.

 

약촌오거리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몰려서, 대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던 최씨는 10년 동안 감옥살이를 해야만 했답니다.

 

그런데 이렇게 약촌오거리 살인사건의 살인범으로 10년간 감옥살이를 했던 최씨가 사실은 진범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최씨가 감옥살이를 하는 동안, 진짜범인이 새롭게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무고한 최씨가 교도소에서 감옥살이를 하고있는 동안에, 다른 사건으로 경찰조사를 받고있던 또다른 김씨가 스스로 자신이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의 진짜 범인이라고 자백을 한 것이랍니다.

 

정말 황당하고도 희한한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이랍니다.

 

, 최씨는 사건 당일 그냥 약촌오거리 현장을 지나가는 목격자이었을 뿐인데, 경찰이 강압적인 수사와 고문 때문에 살인범으로 몰리게 됐고,

결국 대법원재판에서 유죄확정판결을 받아 10년 동안 억울한 감옥살이를 해야만 했답니다.

 

약촌오거리 살인사건은 경찰의 강압수사와 극심한 고문 때문에, 한 무고한 시민이 살인범으로 몰려 억울한 감옥살이를 해야만 했던 매우 황당한 사건이 되고야 말았답니다.

 

담당경찰들이 얼머나 강압적인 심문을 하고 심한 고문을 했으면, 무고한 시민이 이렇게 살인범으로까지 몰리게 되었을까요?

 

약촌오거리 살인사건의 전말은 이렇습니다.

 

전북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의 전말

 

2000810일 새벽 2시경 전북 익산시 영등동 약촌오거리 근처의 도로에서, 당시 42세의 택시기사가 누군가가 휘두른 흉기에 찔려서 자신의 택시안에 피를 흘린 채 사망하고 말았답니다.

 

 

그런데 그 비슷한 시각 그 택시기사가 숨져있는 그 현장도로를 16살의 배달원 소년이 오토바이를 몰고 지나가고 있었답니다.

그 약촌오거리 살인 현장을 지나갔던 오토바이 배달원이 바로 살인누명을 쓰고 10년간 감옥살이를 했던 최씨랍니다.

 

하필 최씨가 2000년 그 비슷한 시간대에 살인사건이 일어난 약촌오거리 도로를 오토바이를 몰고 지나가는 바람에, 경찰로부터 살인범으로 몰리게 되었답니다.

 

최씨는 익산경찰서에 가서 자신이 약촌오거리에서 목격했던 사실을 사실대로 진술해줬답니다.

 

최씨는 그 살인사건이 발생한 비슷한 시간대에 범행현장인 약촌오거리를 지나가고 있었고, 또한 실제로 그 택시기사가 숨진 그 택시를 보았으며, 그 택시에서 누군가가 나와서 도망치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실제상황을 최씨는 익산경찰서에 가서 사실대로 진술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최씨는 약촌오거리 살인사건의 최초의 목격자였던 셈이랍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엄청난 반전이 일어나게 됩니다. 최씨의 목격담을 전해들은 경찰은 목격자 최씨는 살인범으로 의심하게 되었답니다.

 

경찰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한 최씨는 잔인한 경찰들에 의해서 급기야 살인범으로 몰리게 됐고, 익산경찰서 담당경찰들은 최씨를 경찰 취조실에 가둬놓고 극심한 고문과 강압적인 심문을 했답니다.

 

 

최씨의 진술에 의하면, 당시 취조를 담당했던 경찰들은 나이 어린 최씨를 며칠동안 최조실에 가둬놓고 여러명이 돌아가면서 최씨에게 심한 욕설을 퍼붓고 주먹과 발길질 등 심한 구타와 고문을 자행했다고 합니다.

 

그당시 고작 만 15살밖에 안된 나이 어린 최씨는 건장한 덩치의 여러명의 형사들의 극심한 폭력과 고문에 시달린 끝에, 경찰의 자백문서에 도장을 찍을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최씨는 처음에는 자신의 범행이 아니라고 강력히 부인했지만, 경찰들이 그를 며칠동안 감금해놓고 계속해서 폭력과 고문을 자행했다고 합니다.

 

, 익산경찰서 경찰들의 폭력을 동반한 자백강요에 최씨는 어쩔 수 없이 응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당시 담당경찰은 목격자에 불과했던 최씨에게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고문과 강요를 자행한 끝에, 살인범으로 탈바꿈시켜버린 것이랍니다.

 

정말 있어서는 안될 황당한 일이 경찰서에서 벌어진 겁니다.

결국 목격자에 불과했던 최씨는 경찰들의 엄청난 폭력과 구타, 고문, 협박 때문에, 졸지에 목격자에서 살인용의자로 둔갑해버린 겁니다.

 

경찰이 올린 이같은 보고서를 접한 담당경사도 그대로 최씨를 살해용의자로 추정했고, 결국 최씨는 살인강도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고 말았답니다.

 

그리고 이어진 1심재판에서 재판부는 검경이 제출한 정황증거와 진술만으로, 구체적인 물적증거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최씨에게 징역형 15년의 유죄판결을 내렸답니다.

 

 

  그렇지만 최씨가 1심재판에 불복하여 항고를 하였고 곧바로 2심재판이 이어졌는데,

2심재판부도 1심재판의 범죄사실을 그대로 용인한 끝에 최씨에게 원심보다 5년 감량한 징역형 10년의 유죄판결을 내리게 됩니다.

 

더이상 재판을 진행해봤자, 자신에게 유리한 판결이 나오기가 어렵다고 판단한 최씨는 대법원에의 상고를 포기한 채로, 교도소에 수감되어서 10년간 복역하게 됩니다.

 

  약촌오거리 살인사건의 진범이 나타나는 대반전

 

이렇게 최씨가 교도소에 수감된 지 3년이 지난 2003년도에 약촌오거리 지역에서는 약촌오거리살인사건의 진범은 따로 있다는 해괴한 소문이 나돌게 됩니다.

 

이당시 약촌오거리 일대의 사람들 사이에서 약촌오거리살인사건의 범인은 김씨라는 소문들이 퍼져나가고 있었고, 이 소문을 인지했던 군산경찰서는 소문의 관련자들인 김씨와 임씨를 경찰서로 불러들여서 진위를 조사하게 됩니다.

 

군산경찰서의 담당경찰이 김씨와 임씨를 불러 진위여부를 추궁했고, 처음에 두사람은 머뭇거리면서 말을 꺼렸지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김씨와 임씨는 사실대로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범인임을 시인했고 모든 사실을 자백했다고 합니다.

 

, 소문의 주인공인 김씨는 자신이 약촌오거리 도로에서 택시기사를 흉기로 목주위를 찔러서 살해한 사실을 스스로 자백했고, 아주 구체적으로 진술했답니다.

그리고 김씨의 친구 임씨는 김씨가 범행에 사용된 흉기를 김씨의 부탁으로 자신의 집에 보관해주었다고 자백을 했답니다.

 

 

김씨는 택시기사 유씨가 도망가려고 택시문을 열었던 것과 자신이 여러번에 걸쳐서 유씨의 목주변을 흉기로 찔렀다는 것등 아주 세부적인 사항까지도 속속들이 자백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김씨와 임씨 두사람의 자백을 통해서 약촌오거리 살인사건의 진짜범인이 김씨인 것으로 확인되었고, 이로써 약촌오거리 살인사건은 대반전이 일어나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군산경찰서에서는 범행을 자백했던 김씨와 임씨를 이틀뒤에 슬며시 풀어주는 일이 발생합니다.

 

김씨가 스스로 자신이 진짜범인이라고 자백했는데도 불구하고, 경찰은 김씨와 친구 임씨는 더이상 기소하지도 않고, 석방하고 맙니다.

 

당시 군산경찰서에서는 왜 자신의 범행을 스스로 자백했던 두사람을 풀어주었던 것일까요?

두사람을 경찰이 석방했던 이유는 분명히 있습니다.

 

유력한 용의자 김씨를 경찰이 풀어줄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당시 지휘권을 가졌던 담당검사의 방해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당시 군산경찰서의 경찰들이 담당검사에게 용의자 김씨를 구속해달라고 구속영장의 청구를 요구했지만, 담당검사는 구속영장 청구를 거부하고는 기각버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담당검사는 경찰이 용의자 김씨를 수사하는 것을 여러 가지로 방해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담당검사가 경찰이 김씨를 수사하는 것을 교묘한 방법으로 방해하는 바람에, 자신의 범행을 자백까지 했던 김씨는 그냥 석방될 수 밖에 없었고, 강력한 확신을 가졌던 경찰은 유력한 용의자를 그냥 놓쳐버리게 된 것이랍니다.

 

이렇게 담당검사가 유력한 용의자였던 김씨를 수사하지 못하게 방해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 담당검사가 약촌오거리살인사건을 직접 담당했던 검사로서, 최초의 목격자인 최씨를 직접 기소해서 살인범으로 몰고갔던 그 검사라고 합니다.

 

최초의 목격자인 최씨를 살인범으로 몰고가서 그를 유죄판결을 받게 만들었던 장본인이 바로 그 담당검사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담당검사가 직접 최씨를 살인범으로 기소해서 유죄판결을 받게 했던 장본인인데, 그 똑같은 사건을 갖고 또다른 진짜범인을 기소하고 재판을 받게 한다면, 자신의 과거의 잘못을 스스로 들춰내는 꼴이 된답니다.

 

 

, ‘약촌오거리살인사건의 살인범을 이미 기소해서 징역형을 살도록 만들었는데, 그 똑같은 사건에 또다른 범인을 기소해서 재판을 받게 한다면, 자산의 과오가 그대로 드러나게 된답니다.

 

그래서 그 담당검사는 자신의 과거의 과오를 꽁꽁 숨겨놓기 위해서,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른 김씨를 기소하지 않고, 그냥 풀어주게 만든 것이랍니다.

 

검사는 정의의 수호자이고, 형사사건의 최종 수사권과 기소권을 가진 자로서, 범죄인을 끝까지 추격해서 잡아내고 기소하는 데 앞장서야될 책임자입니다. 그런 검사가 정말 해서는 안될 비열한 짓을 행하고 말았답니다.

 

자신의 과거의 과오를 감추기위해서, 살인사건의 가장 유력한 용의자를 풀어주었다고 하니, 결코 있어서는 안될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한 검사는 죄없는 무고한 최씨에게 죄를 뒤짚어씌워서 그를 살인범으로 만들었던 것이고, 무고한 최씨를 10년 동안 억울한 옥살이를 하게 만들었던 것이랍니다.

또다른 검사는 진짜범인이 나타났는데도 그를 풀어주었고 그를 수사하지 못하도록 방해했답니다.

 

약촌오거리 살인사건에서 두명의 검사들이 엄청난 잘못들을 반복해서 저질렀던 것입니다.

당시 군산경찰관들의 정당한 구속영장 청구요청을 거부한 검사는 당시 전주지방검찰청 군산지청 소속의 정검사라고 합니다.

 

 

이 악질검사, 언젠가는 자신의 이같은 비열한 범죄행위에 대해 반드시 그 댓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억울한 누명을 쓰고 10년이란 긴 세월동안 옥살이를 했던 최씨는 2010년도에 교도소에서 출감했답니다.

 

교도소에서 출감한 최씨는 자신이 죄가 없음을 밝히기 위해서 곧바로 법원에 재심청구를 하게 됩니다.

 

최씨는 20155월 광주고등법원에 재심을 청구했고, 광주고등법원은 최씨의 청구를 받아들여서 약촌오거리살인사건은 다시 심사를 받게 되었지요.

 

약촌오거리살인사건을 다시 심사했던 법원은 최씨가 경찰의 강압적인 수사와 협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허위자백을 하게 되었다는 점을 인정했고, 따라서 최씨에게는 전혀 혐의가 없다는 점을 인정했습니다.

 

결국 201611월에 광주고등법원은 최씨에게 무죄를 선고하게 됩니다.

 

죄도 없이 억울하게 10년 옥살이를 했던 최씨는 사건이 발생한 지 16만에 자신이 약촌오거리 살인사건에서 무죄임을 인정받게 되었고, 자신의 누명을 풀 수 있었답니다.

 

그리고 이렇게 최씨에 대한 재심이 진행되던 그해 8월달에 과거 최씨에 대해 강압적인 심문을 벌였던 담당형사 박경위가 스스로 자살했다고 합니다.

, 2000년도에 약촌오거리 살인사건의 수사를 벌여서 가혹적인 방법으로 심문을 벌였다는 의심을 받아왔던 담당형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입니다.

 

 

가혹적인 방법으로 최씨를 심문했다고 알려진 그 담당형사가 가족들에게 문자로 유서를 남긴 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최씨가 무죄선고를 받게되자, 경찰은 다시 유력한 용의자 김씨에 대한 수사를 재개했습니다.

 

경찰은 김씨를 구속기소하였고, 2018327, 김씨에 대한 재판에서 대법원은 김씨가 택사기사를 살해했다는 점을 인정하였고, 김씨에게 징역형 15년의 유죄판결을 내렸답니다.

 

약촌오거리살인사건은 사건 발생 18년만에 억울한 옥살이를 한 최씨의 무죄가 밝혀지게 됐고, 진짜범인인 김씨에게 유죄판결이 내려지게 된 것입니다.

 

뒤늦게 나마 억울한 누명을 쓴 최씨의 누명이 벗겨지게 되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비록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약촌오거리살인사건의 진범이 붙잡히게 되어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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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반헬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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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7대불가사의) 이집트 쿠푸왕의 대피라미드의 미스테리, 비밀의 방

 

문명이 많이 발달한 현대사회에서도 그 실체를 풀어내지 못한 미스테리한 고대의 건축물들이 많이 존재하고 있다.

 

그 어떤 과학적인 분석기법을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그 실체와 원인을 규명하지 못하는 미스테리한 건조물들이 아직도 많이 존재하고 있는데,

이것을 세계 7대 불가사의라고 부르기도 하며, 다른 말로 인간이 만든 가장 기적같은 건축물이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바빌론의 공중정원과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 올림피아의 제우스 상과 로도스의 거상, 마우솔로스의 영묘, 알렉산드리아의 등대, 그리고 기자의 대피라미드가 세계 7대 불가사의로 일컬어지고 있다.

 

이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에서 현재까지 존재하고 있는 건축물이 바로 대피라미드이다.

 

이집트의 기자지구에 있는 세상에서 가장 큰 피라미드가 바로 대피라미드이다.

이 기자의 대피라미드는 온통 미스테리에 둘러쌓인 건축물로 유명하다.

   

기자의 대피라미드가 축조된 시기는 기원전 2560년이며, 이집트의 제4의 왕조인 쿠푸왕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쿠푸왕의 무덤으로 알려진 이 대피라미드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피라미드 가운데 가장 큰 피라미드로 유명하다.

 

세상에서 가장 크다는 이 대피라미드는 그 건축기법과 사용용도, 그리고 비밀의 방 존재 등 아직까지도 학자들도 풀지못한 미스테리들이 많이 남아있다.

 

영화 미이라등 수많은 영화들의 소재로 등장해왔던 기자지구의 대피라마드는 과연 누가 무슨 용도로 만들었고, 또 이 거대한 크기의 피라미드를 어떤 방법으로 만들었는지가 여전히 미스테리이다.

 

일부 이집트학자들에 의해서, 이 대피라미드는 ‘’쿠푸왕의 무덤일 것으로 지목되어 왔다.

그리고 대피라미드 옆에서 아들피라미드와 손자피라미드도 함께 세워져 있다고 한다.

 

또한 이 대피라미드 곁에는 대피라미드를 지키는 수호신 역할을 하는 거대한 스핑크스가 세워져 있어서 신비로움을 더해주고 있다.

 

대피라미드가 쿠푸왕의 무덤이라는 증거는 없다

 

과연 기자지구에 있는 대피라미드가 정말로 쿠푸왕의 무덤이 맞는 것일까?

 

 

기자지역의 대피라미드는 그 웅장한 모습과 거대한 크기에서부터 신비감이 느껴질 수밖에 없다.

 

대피라미드의 높이는 무려 147m나 되며, 밑변의 길이는 230m나 된다.

그리고 대피라미드는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사각뿔의 형태로 되어 있는데, 밑바닥의 네변의 방향이 정확히 동서남북을 항하고 있다.

 

나침반이 전혀 없었던 기원전 2560년도의 시기에, 어떻게 이렇게 정확하게 동서남북의 방향을 잡을 수 있었는지도 불가사의한 일이다.

 

기원전 2560년도의 시기에 어떻게 높이 147m나 되는 이 거대한 건축물을 만들 수가 있었는지, 정말로 신기하고 놀랍기만 하다.

 

19세기 파리의 에펠탑이 세워지기 전까지만 해도, 대피라미드가 세상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고 한다.

 

 

대피라미드 내부의 구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피라미드의 내부에는 원래 3개의 방이 존재하고 있다.

 

대피라미드의 입구를 통해서 들어가면, 지면에서부터 21m 높이에 왕비의 방이 나오며, ‘왕비의 방앞에서 대회랑이 연결되어 있으며, 47m 길이의 대회랑의 끝부분에는 왕의 방이 나온다.

 

왕의 방은 지표면으로부터 42m 높이에 위치해 있다.

 

그리고 대피라미드에 처음 입구에서 들어갔을 때에, 위로 올라가면 왕비의 방이 나오지만,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지표면으로부터 30m 아래부분에 장례의 방이 하나 존재한다.

 

이렇게 대피라미드에는v ‘왕의 방왕비의 방’, 그리고 장례의 방등 모두 3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피라미드의 미스테리

 

첫째 미스테리, 대피라미드 축조에 사용되었다는 수많은 돌들을 어떻게 먼 지역에서 운반해왔을까?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대피라미드에 사용된 수백만개의 돌들을 50km 떨어진 지역과 900km 떨어진 지역에서 운반해왔다고 한다.

 

 

한 두 개의 돌도 아니고, 수톤씩 나가는 이렇게 무겁고 많은 돌들을 수십킬로에서 수백킬로의 거리에서 어떤 수단을 통해서 운반해왔는지가 미스테리가 아닐 수 없다.

 

대피라미드 외부의 돌들은 석회석인데, 이 석회석은 50떨어진 남쪽지역에서 운반해왔다고 하며, 대피라미드의 내부에 사용된 석재는 화강석인데, 이 화강석은 무려 900km 떨어진 아스완지역에서 운반해왔다고 한다.

 

지금처럼 열차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거대한 탱크롤리차량이 있는 것도 아닌, 아주 미개한 시기인 기원전 2,500년 경의 시대에 어떤 운반수단을 사용해서 2백만개가 넘는 돌들을 900km나 떨어진 먼지역에서 운반해왔는지가 의문점이다.

 

대피라미드를 짓는 데에 사용된 돌이 몇십개나 몇백개 정도라면, 아무리 거리가 멀다고 하더라도 해볼만하다고 본다.

 

그렇지만 대피라미드 축조에 사용된 돌들은 무려 230만개나 되는데, 230만개나 되는 돌들을 원거리에서 어떻게 운반해왔는지가 수수께끼인데,

그 시대에는 사실상 이렇게 많은 돌들을 수백킬로의 거리에서 운반해온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본다.

 

혹자는 대피라미드에 사용되는 돌들은 나일강의 배를 통해서 운반해왔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수백만개나 되는 돌들을 운반선을 사용해서 나일강으로 운반해왔다고 치자, 그렇지만 이 돌들을 나일강에서 현장까지 또다시 몇십km를 운반해야 하는데, 돌 하나의 무게가 평균 2.5톤이나 될 정도로 무거운데,

지금같이 열차나 거대한 화물차가 없었던 청동기시대에 어떤 운반수단을 써서 운반했는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만약 2.5톤이나 되는 돌 2백만개를 낙타나 말을 이용해서 옮겼다고 한다면, 그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다.

 

평균 80kg 몸무게의 사람을 태우고 운반하는 낙타도 힘이 무척 든다고 하며, 만약 100kg 정도의 사람이 낙타나 말에 올라탈 경우, 그 낙타나 말은 몸이 무척 약해지고 힘들어한다고 한다.

 

그런데 2.5톤이나 되는 돌을 200만개 넘게 나르게 한다면, 그 낙타나 말들은 몇 번 날라보지 못하고 모두 탈진해서 죽을 것이다.

 

둘째 미스테리, 200만개가 넘는 돌들을 어떤 방법으로 147m의 높이까지 올려놓을 수 있었을까?

 

대피라미드를 축조했다고 알려진 시기는 기원전 2.560년도라고 한다. 기원전 2.560년도라면 우리나라에서는 신석기시대에 해당한다.

이 시기에 우리나라나 동아시아지역은 철기나 청동기가 발견되기 전인 원시적인 신석기시대였다.

 

우리보다 조금 문명이 앞섰던 이집트지역도 이시기는 청동기 초기시대에 해당한다.

이 시기는 철기문화가 태동하기 훨씬 전의 시기였기 때문에, 철기도구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대피라미드가 건설된 기원전 2.560년도는 분명 청동기초기의 시대였는데, 대피라미드에 사용된 돌의 무게는 평균 2.5톤이며, 230만개의 돌이 사용됐다.

 

지금처럼 철제 타워크레인이 없던 청동기시대에 어떻게 수백만 개의 돌들을 147m의 높이까지 올려놓을 수 있었을까?

 

대피라미드를 건설하는 데에, 230만개의 돌들이 사용되었고, 100m 이상의 높이에 수십만개의 돌들이 사용되었을 것을 판단할 수 있다.

 

철제기구도 전혀 없던 시기에, 타워크레인도 없던 시대에, 어떻게 수십만개의 돌들을 100m 이상의 높은 곳에 올려놓았는지가 의문점이라고 하겠다.

 

그 당시는 청동기시대이기 때문에, 청동기로 거중기를 만들어서 2.5톤 무게의 돌 수십만개를 100m 이상의 높이까지 끌어올려야만 했는데, 이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청동으로 만든 기구는 무척 연하고 약하기 때문에, 2.5톤의 돌을 거중기로 끌어올린다면, 그 청동제 거중기는 금방 휘어져 버리거나, 부러져버릴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수원화성을 건축하는 데에 정약용이 거중기를 이용해서 돌을 올려놓았다고 한다. 그런데 수원화성에서 거중기가 1톤이하의 돌을 들어올렸지만,

그 높이는 고작 5m에 불과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때의 거중기는 청동이 아닌 철기로 만든 것이다.

 

그러나 기자지구의 대피라미드의 높이는 5m가 아닌 최고 147m나 되기 때문에, 철기가 아닌 청동제 거중기로는 사용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만약 지금처럼 철제로 된 타워크레인이 있었다고 해도, 200만개가 넘은 2.5톤의 돌들을 147m의 높이까지 끌어올려놓는 것은 무척 힘들고 어려운 작업이 될것이다.

 

그렇지만 대피라미드를 축조했던 시기는 청동기 초기의 시대인 기원전 2.560년도이기 때문에, 결코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셋째 미스테리, 대피라미드는 쿠푸왕의 무덤이라고 하는데, 과연 쿠푸왕의 무덤이 맞는 것인가?

 

이집트의 일부학자들은 기자지구의 대피라미드가 쿠푸왕의 무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대피라미드에 있는 왕이 방이 바로 쿠푸왕의 묘실이라고 주장하고 있고, 이것이 오랫동안 정설처럼 내려오고 있다.

 

 

그런데 대피라미드가 쿠푸왕의 무덤이라는 구체적인 증거물은 하나도 나오지 않고 있다.

 

대피라미드 내부에 있는 묘실에는 쿠푸왕과 관련된 그 어떤 유물이나 흔적이 하나도 나오지 않고 있다.

 

다른 이집트무덤들에서는 값나가는 보석이나 장식품, 제기도구들, 금은보화등 왕의 무덤을 상징하는 부장품들이 수없이 많이 나오고 있고, 왕의 미이라도 함께 출토되고 있다. 원래 왕의 무덤에서는 이런 미이라와 부장품들이 함께 나오는 것이 정상이다.

 

그렇지만 대피라미드의 그 어떤 방에서도 쿠푸왕의 무덤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그 어떤 흔적도 나오지 않았다.

 

미이라나 부장품은 고사하고, 천조각 하나, 깨진그릇 하나 나오지 않았다고 하며, 다른 이집트유적에서 흔히 발견되는 벽면에 기록된 상형문자나 벽화도 이곳에서는 단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 기자지구의 대피라미드에서는 쿠푸왕의 무덤이라는 그 어떤 흔적도 전혀 나오지 않았던 것이며, 이 대피라미드가 쿠푸왕의 무덤이라는 것은 소수의 이집트학자들의 추정에 불과한 것이다.

 

대피라미드 안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것은 왕의 무덤안에 있는 뚜껑없는 석관이 유일한 부장물이다.

이 석관에는 아무런 장식이나 벽화, 상형문자 표시가 전혀 없기 않았기 때문에, 이 석관이 쿠푸왕의 석관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대피라미드 안에는 왕의 방안에 그냥 텅빈 석관 하나가 뚜껑도 없이 덩그렇게 놓여있는 것이 전부이다.

 

이렇게 아무런 증거도 흔적도 없는데, 이 대피라미드를 쿠푸왕의 무덤이라고 단정짓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본다.

 

가자 지구의 대 피라미드가 정말 쿠푸왕의 무덤이라면, 거기서 황금이나 보석 등 왕을 상징하는 부장품과 왕의 미이라가 분명 나왔어야 한다.

그렇지만 대피라미드에서 왕을 상징하는 그 어떤 부장품과 상징물들이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혹시 도굴꾼들이 대피라마드에 몰래 들어와서, 왕의 미이라와 부장품들을 도굴해간 것은 아닌가?

 

그런데 9세가 초반경 이집트의 압바스왕조의 칼리프였던 알 마아문이 대피라미드안에 들어가서 탐사를 했었다고 알려졌다.

 

 

칼리프는 당시 이집트의 이라는 칭호로 사용되었는데, 9세기경 이집트 의 왕 알 마아문은 대피라마드의 속에 혹시 보물이 숨겨져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대피라미드 속으로 들어가서 탐사활동을 벌였지만, 왕의 미이라나 보물, 부장품을 하나도 찾지 못했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9세기경, 왕 알 마아문이 기자지구의 대피라미드에 최초로 내부진입에 성공한 사례라고 한다.

, 이집트의 왕 알 마아문이 최초로 대피라미드로 들어가는 입구를 발견했다고 하므로, 그가 대피라미드 내부에 최초로 들어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전까지 그 누구도 대피라미드의 입구를 찾지못한 상태에서, 9세기경에 왕 알 마아문이 최초로 대피라미드 내부의 통로로 들어가기 위해서 입구를 막고있는 두꺼운 화강암석을 뚫었고, 그 때에 비로서 대피라미드의 내부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가 열리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왕 알 마아문 이전까지는 대피라미드 내부로 들어갈 수 있는 입구가 두꺼운 화강암으로 막혀있어서, 그 어떤 누구도, 심지어 그 어떤 도굴꾼들도 대피라미드 내부로 들어갈 수 없었다고 한다.

, 왕 알 마아문이 대피라미드에 최초로 들어갔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최초로 입구를 뚫고서 대피라미드 내부로 들어갔던 왕 알 마아문은 그 어떤 보물이나 부장품들도 발견하지 못했고, 왕의 시체나 미이라도 전혀 찾지못하고 빈털터리가 되어 나왔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대피라미드에는 애초부터 보물이나 부장품들이 없었다고 볼 수 있으며, 왕의 미이라도 없었다고 보는 것이 정답이다.

 

 

대피라미드 내부형태는 네가지의 구조로 되어 있는데, 대회랑, 왕의 방, 왕비의 방, 지하의 방으로 되어 있다.

 

대피라미드의 입구와 통로를 처음으로 뚫었던 왕 알 마아문은 그속에 엄청난 황금과 보물이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들어갔지만, 왕의 묘실이나 왕비의 묘실,

그리고 지하의 방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텅 비어있었다고 하니, 얼마나 실망이 컸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대피라미드 속에 유일하게 존재했었던 것이 왕의 방안에 놓여져 있는 뚜껑이 없는 석관 뿐이었다.

 

왕의 방은 길이 10.5m, 높이 6m로 되어 있으며, 남쪽과 북쪽에 두 개의 환기통이 나있으며, 왕의 방안에는 텅빈 석관 하나만 있었는데, 이 방이 정확히 무엇을 하는 방인지, 그 용도를 정확히 판단할 수 없는 상태이다.

 

만일 이 곳이 진짜로 왕의 무덤이었다면, 그 벽면에 상형문자나 벽화로 왕의 무덤을 설명하는 문구나 왕의 치적을 기록해놓는 것이 정상일 것이다.

 

그렇지만, 대피라미드의 그 어떤 방에도 벽화나 기록이 전혀 없었다고 하며, 단 한 개의 부장품도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일부학자들은 대피라미드의 왕의 방은 쿠푸왕의 진짜 묘실을 보호하기 위해서, 위장용으로 지어진 가짜묘실일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 쿠푸왕의 진짜 묘실은 다른 곳에 만들어져 있고, 왕의 방은 도굴꾼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 위장용으로 만들어진 가짜 묘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쿠푸왕의 진짜묘실은 대피라미드 바로 앞에 있는 스핑크스의 지하에 있는 비밀의 방이라고 한다.

 

관광객들이 기자지역의 대피라미드 앞으로 가서 보면, 마치 대피라미드를 보호하기 위해서 바로 앞에 앉아있는 거대한 스핑크스를 발견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 스핑크스를 대피라미드를 보호하기 위한 수호신의 상징물처럼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몇 년 전에 이 스핑크스에서 내부로 통하는 구멍이 하나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학자들이 이 구멍으로 들어가서 조사활동을 벌이길 원했지만, 이집트정부가 이 곳을 원천봉쇄하고 아무도 출입하지 못하게 막아놓았다고 한다.

 

일련의 고고학자들은 이 스핑크스 지하에 있는 비밀의 방이야말로 진짜 쿠푸왕의 무덤이며, 이곳에 막대한 양의 금은보화가 숨겨져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집트정부가 엄격하게 출입을 차단하고 있어서, 아무도 그 미스테리를 풀지 못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집트정부가 도대체 무슨 이유로 스핑크스의 비밀의 방을 봉쇄하고 있는지, 젼혀 알 길이 없으나, 그 비밀의 방에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은 분명해보인다.

 

관광으로 먹고사는 이집트가 이같은 특별한 관광포인트를 공개해서 더많은 관광수입을 올리는 것이 정상인데도, 오히려 관광포인트를 봉쇄한다는 것은,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세상사람들에게 함부로 얘기할 수 없는 충격적인 내용의 그 무언가가 그 비밀의 방에 숨겨져 있을 것으로 판돤된다.

 

한 예언가는 이 스핑크스 내부에 피라미드의 미스테리를 풀 수 있는 열쇠가 숨겨져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 예언가의 말에 의하면, 만일 스핑크스의 비밀의 방이 열리게 되면, 세상사람들에게 엄청난 재앙이 닥친다고 한다.

 

내 주관적인 생각에 의하면, 그 비밀의 방에서 인류에게 재앙을 가져다주는 무언가가 있는 게 아니라, 인류의 기원의 비밀이나 인류생성의 비밀이 담겨있는 특별한 문서가 존재하고 있지 않을까 판단된다.

 

그곳 스핑크스 지하의 비밀의 방에는 최초로 인류가 지구에 출현해서 정착하게 된 계기나 인류가 어디서 왔는지를 밝혀주는 외계인의 기록들이 보관되어 있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사실 여러명의 채널러와 초현상연구가들이 기자지구의 피라미드와 스핑크스가 있는 지역이 외계인들이 다른 외계의 세상과 교신하는 교신장소라고 언급했던 적이 있고,

한 외계인들이 이 대피라미드지역을 지구에서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 여기고 있다고 한다.

 

기원전 2500년의 시기에 기자지구의 거대한 대피라미드는 그 당시 인간의 능력이나 기술력으로는 결코 만들 수가 없는 구조물이며, 오직 인류보다 한차원 높은 외계인들의 우월한 기술력만으로 건설할 수 있는 구조물이라고 판단된다.

 

기원전 2500년은 우리나라에서는 단군조선이 탄생하기도 전인 아주 미개한 신석기시대였고, 동양보다 조금 문명이 앞섰던 이집트지역도 청동기시대 초기였기 때문에,

이렇게 문명이 낙후되었던 원시적인 시기에 인간의 힘으로는 결코 대피라미드 같은 거대한 구조물을 만든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이렇게 낙후된 시기에 저렇게 거대한 대피라미드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외계인의 선진문물에 의해서만 가능했다고 보여진다.

 

우리가 믿고 싶든, 믿기 싫든 지금으로부터 4,579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대피라미드는 외계인의 개입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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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인테리어의 가구배치법, 침대와 거실, 주방구조와 그림

 

집안에 가구를 어떻게 배치하고 인테리어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그 집안사람들의 건강과 복이 달라질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을 풍수인테리어라고 하는데, 예로부터 풍수와 건강과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알려져왔다.

 

우리나라의 전통사상인 풍수지리사상에 의하면, 산과 물, 집을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서 인간의 길흉화복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그리고 실내의 가구나 인테리어를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서, 역시 그 집안사람들의 건강과 복, 재물에 큰 영향을 준다고 한다.

 

방송 나는 몸신이다에서는 실내 인테리어가 한 집안 구성원들의 건강과 길흉화복에 큰 영향을 끼치는 풍수인테리어를 소개하고 있어서, 시청자들의 큰 주목을 받고 있다.

 

평소에는 그냥 무심코 넘겨버렸던 내 집안의 가구배치나 인테리어가, 우리의 건강과 재물상태에 큰 영향을 준다고 하니, 여러분들도 한번 관심을 갖고서 집안의 인테리어를 다시한번 살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그럼 박성준 풍수인테리어 전문가가 소개하는 한집안의 건강과 복기운이 들어올 수 있는 풍수인테리어법을 한번 살펴보도록 하자!

   

안방과 거실, 주방 현관의 풍수인테리어 가구배치법

   

풍수인테리어에 의하면, 집안의 구조와 가구나 소품의 배치를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서, 그 집안의 건강과 복기운, 그리고 재물운에 큰 영향을 끼친다고 한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한 집안의 구조별 가구나 소품배치가 그 집안에 건강과 복을 증진시키고, 재물운을 더 좋게 만들 수 있는 풍수인테리어법을 알려주도록 하겠다!

건강과 재물운을 상승시키는 풍수인테리어를 안방과 거실, 주방, 현관순으로 소개해보기로 하겠다.

 

1. 안방 풍수인테리어

 

안방은 사랑과 행복, 재물과 관계가 깊은 공간으로 풍수인테리어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할 곳이다.

 

안방에서 건강과 재물운을 상승시킬 수 있는 풍수인테리어의 핵심은 바로 침대의 위치이다.

  침대의 머리맡이 문이나 화장실 방향으로 향하지 않도록 해야한다. 그러니까 안방의 침대는 문의 방향과 정반대의 방향으로 향하도록 해야 한다.

 

 

침대는 문을 열었을 때에, 대각선상에 있는 두벽면으로 머리맡이 향하도록 위치하는 것이 좋다.

이 대각선쪽이 사랑과 재물이 쌓이는 럭키존이라고 하는 아주 운세를 좋게 만드는 방향이다.

 

이 두 대각선방향으로 침대의 머리맡을 항하게해서 잠을 자는 것이, 부부의 금슬도 더 좋아지고, 재물도 더 많이 쌓이게 해주는 효과를 가져다준다.

 

또한 침대의 맞은편쪽에 커다란 장롱이나 경대를 두는 것은 좋지 않은데, 위압감을 안겨줄 수 있기 때문이다.

안방의 장롱은 침대의 맞은편에 두지말고, 될 수 있으면 침대의 옆쪽에 작은 크기의 장롱이나 경대를 두는 것이 좋다.

 

나이 어린 학생은 잠을 잘 때에 머리를 동쪽으로 향하는 것이 좋고, 나이 드신 어른은 머리를 북쪽으로 향하는 것이 좋다.

 

동쪽은 만물이 소생하는 방향이기 때문에, 동쪽으로 머리를 두고 자면, 창의력이나 학습의욕이 향상될 수 있으며, 머리를 북쪽으로 두면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

 

단 머리를 서쪽 방향으로 두고 자는 것은 안좋다. 서쪽은 물체의 기운이 쇠락해지는 방향이기 때문이다.

 

남쪽으로 머리를 항하는 것도 안좋은데, 남쪽은 햇빛이 직선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집중력이 떨어지게 된다.

  침실의 조도는 약간 어두우면서 아늑한 느낌을 주는 것이 좋고, 현관은 아주 밝은 상태로 조도를 해놓는 것이 좋다.

 

부부간의 금슬을 좋게하는 그림이 바로 잉어그림인데, 잉어는 다산의 상징으로 부부간의 애정을 더욱 돈독하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고 하니, 잉어그림을 침실이나 거실에 하나 걸어두는 것이 좋다.

   

2. 거실 풍수인테리어

 

거실은 집안의 화목과 행복을 담당하는 공간으로 이 거실의 풍수인테리어에도 신경을 많이 쓰는 것이 좋다.

 

밖에서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에, 눈에 보이는 대각선 지점에 소파를 놓는 것이 좋다.

이 소파는 창문을 등지는 것은 좋지않으며, 소파 바로옆에 에어컨이나 가구를 놓는 것도 풍수상 좋지않다.

 

 

그리고 소파가 있는 부분의 건너편에 TV를 놓는 것이 좋다.

 

현관에서 거실로 들어오는 입구부분에 가구나 탁자로 막아놓은 것은 복이 들어오는 것을 막게 되므로 좋지않다.

 

또한 거실에 풍경화를 걸어놓은 것이 좋은데, 이 풍경화는 소파에서 보이는 장소에 걸어놓은 것이 좋다.

 

또한 TV가 있는 벽면에 잡다한 장식물이나 소품들이 있는 것도 좋지 않으며, 거실은 잡동산이나 인형, 잡다한 장식물이 없는 것이 좋고, 거실은 항상 잘 정리정돈되어 있는 것이 풍수건강상 좋다고 한다.

 

인형이나 잡다한 장식소품들은 수납장안에 잘 정돈시켜서 넣어두는 것이 좋다.

 

또한 어항은 돈이나 재물을 불러들이는 좋은 매게체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거실에 작은 어항이나 작은 수족관을 놓아두는 것이 좋다.

어항은 밖에서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에, 바로 눈에 보이는 곳이 설치하는 것이 좋다.

 

거실 밖에 무덤이나 묘지가 보이는 것은 풍수상 나쁜기운이 들어올 수 있기 때문에 안좋은데, 이럴 경우에는 창가에 관엽식물들을 몇 개 놓아두는 것이 좋다.

관엽식물은 잎이 넓고 동그랗게 생긴 식물이 좋고, 관엽식물은 외부의 나쁜기운을 내쫒아 버리고 좋은 기운들을 불러모으는 작용을 한다.

   

3. 주방 풍수인테리어

 

주방은 가족의 건강과 재물과 관계되는 공간인데, 주방은 현관에서 마주보이는 장소에 있으면 안좋다고 한다.

혹시라도 외부의 나쁜 기운이 곧바로 주방으로 들어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방은 화장실과 바로 옆에 있으면 안좋고, 멀리 떨어져있는 것이 위생상 더 좋다.

 

주방에는 양을 상징하는 가스렌지, 전자렌지 등과 음을 상징하는 냉장고, 씽크대가 바로 옆에 있으면, 양과 음이 서로 충돌하게 되므로 안좋다.

 

 

따라서 가스렌지와 씽크대, 냉장고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좋은데, 가스렌지와 씽크대 사이에 관엽식물을 놓아두는 것도 좋은 해결책이다.

이렇게 하면 두 물건 사이에 상생의 기운이 돌 수 있기 때문에, 양과 음이 상충되는 것을 막아준다.

 

주방에 칼이나 젓가락, 가위 같은 뾰쪽한 물건들을 눈에 보이는 곳에 두는 것은 풍수상 아주 안좋다.

이런 물건들은 탁하고 날카로운 기운을 불러들일 수 있기 때문에, 안보이는 공간에 수납해서 두는 것이 좋다.

 

또한 냉장고안에는 2/3 정도만 채워넣고, 나머지 1/3은 비워놓는 것이 좋다. 이렇게 비워놓아야 좋은 기운이 들어올 수 있게 된다.

 

주방식탁은 대리석이나 금속 같은 차가운 성분은 안좋고, 나무나 원목으로 된 것이 좋다.

 

4. 현관 풍수인테리어

 

현관은 그 집의 얼굴이며, 좋은 기운이 들어오게 되는 관문이기 때문에, ‘현관의 가구나 소품배치는 풍수인테리어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현관문을 열었을 때, 거실의 창문이나 발코니가 보이면, 외부에서 들어오는 복이나 재물이 그 창문으로 빠져나갈 수 있기 때문에 안좋다.

 

이럴 때는 그 중간부분에 문을 하나 설치하는 것이 좋다. 이것은 설치비용이 들어가기 때문에, 망설여질 수밖에 없는데, 대신 거실의 중간부분에 관엽식물 화분을 놓아두는 게 좋다.

이렇게 중간부분에 관엽식물 화분을 놓아두면, 복기운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을 수가 있다.

 

문을 열고 현관으로 들어올 때에, 현관문 건너편에 큰거울이 있으면, 매우 안좋다. 밖에서 들어오는 재물이나 복기운이 그 거울에 반사되어서 다시 외부로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재물운을 좋게하는 현관인테리어 방법

 

현관문을 열었을 때, 왼쪽부분에 작고 둥근거울이 있으면, 재물이 외부에서 들어오게 되며, 오른쪽부분에 작고 둥근거울이 있으면, 큰 명예가 얻을 수 있게 된다.

커다란 거울을 주의를 산만하게 만들어서 별로 안좋고, 이 때에 설치하는 거울은 작으면서 둥글거나 사각형태의 거울이 좋다고 한다.

 

 

또한 현관문에 풍경을 달아놓는 것이 좋은데, 풍경은 외부의 나쁜기운이 들어오는 것을 막아주며, 외부에서 좋은 기운이나 재물운을 불러들이는 작용을 한다고 한다.

 

그리고 현관은 밝고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좋고, 현관문을 열고 오른쪽 부분에 노란색의 잎이 넓은 관엽식물 화분을 놓아두는 것이 좋은데, 관엽식물은 나쁜 기운을 쫒아내고 좋은 기운을 불러들이는 기능을 한다.

 

그렇지만 잎이 뾰쪽한 침옆수림이나 선인장은 안좋고, 잎이 동그랗거나 잎이 널따란 관엽식물을 놓아두는 게 좋다.

 

또한 밖에서 현관문을 연 상태에서 오른쪽부분에 풍경화를 걸어두면, 집안에 재물운을 좋게 해서, 돈이나 재물이 들어오게 하는 작용을 하므로 풍경화를 놓아두는 게 좋다.

 

 

현관의 신발들은 바닥에 어지럽게 늘어놓는 것도 좋지 않으며, 신발들은 모두 신발장안에 수납해서 안보이게 하는 것이 좋다.

 

5. 재물운을 상승시키는 그림

 

집에다 걸어놓는 그림액자도 그 집안의 건강이나 재물운애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풍수인테리어에서 가장 좋은 그림은 바로 사과그림과 해바리기그림이다.

 

사과그림은 결실을 상징하는 매체이기 때문에, 금전이나 재물을 불러들이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특히 싱싱한 녹색사과 그림이 아주 좋다고 한다.

사과 이외에도 석류나 포도, 모란그림도 사과처럼 재물운을 상승시키는 작용을 한다.

 

 

또한 노오란 해바라기그림은 번영과 풍요의 기운을 불러들이는 그림이기 때문에, 재물운을 상승시키는 작용을 한다.

 

 

사과그림과 해바라기그림의 위치는 소파에 앉았을 때에 보일 수 있는 곳이나, 밖에서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에 바로 보이는 장소에 걸어두면 좋다.

 

지금까지 소개한 건강과 재물운을 상승시킬 수 있는 풍수인테리어 가구배치법을 잘 기억해주었다가 한번 우리집에도 실천해보도록 하자!

 

이러한 풍수 가구배치법이 내가 사랑하는 우리가족들의 건강과 운세, 재물운을 상승시키는 데에 얼마나 큰 효과가 나타나는지, 한번 실험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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